2016年8月10日水曜日

釜山影島に存在した薩摩堀

ただし、薩摩堀自体の写真ではなく、その地名を記述するのみである。

絶影島西部薩摩堀





부산 동구 수정동에는 두모포왜관이,중구 용두산공원 일대에는 초

량왜관이 있었다는 것 쯤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두모포

왜관에 앞서 존재했던 절영도왜관은 왠지 생소하다.

두모포왜관이

70여년간,초량왜관이 200년 가까이 존속한 데 비해 절영도왜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어수선한 시기 6~7년가량(1601~7년),그것

도 임시건물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일까. 절영도왜관은 상대적으로

학계의 관심에서 벗어난 채 정확한 위치나 규모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지금의 한진중공업 자리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긴 했

지만 엄밀한 고증을 거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향토사학자 김재승씨가 최근 발간된 월간 '시민시

대'에 절영도왜관이 대평동 2가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을 펴며,논

쟁의 불씨를 지폈다.

김씨의 주장을 따라 당시의 상황부터 살펴보자. 대마도 도주를 통

해 첫 강화요청사(사실은 밀정)가 왔던 시기는 1598년 12월로 임

진왜란에서 패해 왜군이 철수하고 난 후 불과 한달 뒤였다.

따라

서 왜인들은 조선 백성들의 적개심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지역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절영도는 최적지였다.

대마

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다 무인도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薩摩·가고시마의 옛 지명) 수군이 군선을 정박시키

기 위해 해안을 준설해 만든 포구(사쓰마보리·薩摩堀)가 남아있

어 밀사들을 안전하게 상륙시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

이었다.

그 뒤 왜관교역 재개를 위한 선물보따리로 왜의 강화요청사들이

임진왜란 때 붙잡아 갔던 조선 민간인-피로인(被擄人)-들을 데리

고 자주 입항하면서 사쓰마보리 해안 언덕에 임시건물이 들어섰고

,이곳이 절영도 왜관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1936년 발행된 부산부사 원고.

'절영도 왜관지는 사쓰마보리 동남 일대 구릉에 있었던 것으로 추

정된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36년 발행된 부산항

도와 비교해 본 결과 사쓰마보리라는 지명이 분명히 명기돼 있다.

바로 대평동 2가 전 대동조선 부산조선소 자리.

한편 절영도왜관은 두모포왜관에 새 건물이 신축되면서 야산으로

변했다가 1934년 영도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구릉이 절개됐다.

사쓰마보리는 해안 매립으로 소형조선소와 선박수리업체가 밀집한

조선공업지로 변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변했다.

이상헌기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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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の文は、http://blog.naver.com/oulwoo/80124837989よりの転載

절영도 왜관

절영도 지도1


절영도 지도2
 절영도 왜관의 위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견해를 달리한다. 그 중에서도 아래 ⓛ과 ②가 가장 많이 거론되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의견을 달리하면서 가설을 제시한다. 단, 이 자료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회원님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학술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까지 추정되는 장소】ⓛ 영도구 대평동 掘江일대
② 영도구 대평동 현 한진중공업 일대
③ 영도구 남항동 掘江일대(필자의 가설) 등으로 지목되고 있다.

《가설 1》 절영도 왜관은 임진ㆍ정유재란으로 조선에서 왜관이 3차에 걸쳐 폐쇄된 후 다시 국교회복을 위해 대마도에서 사절이 부산을 찾아오면서 시작된 임시왜관으로 1601년부터 1607년까지 존속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1598년부터 일본사절의 끈질긴 교섭으로 1601년에 조선정부에서 마련해준 곳이 절영도 왜관이다. 하지만 그곳의 위치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다만 추정으로 이곳저곳을 지적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사쓰마보리(薩摩堀り)라고 하는 곳이 대세이다. 이 사쓰마보리는 임진왜란 때 사쓰마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사쓰마번(薩摩藩)의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선박의 정박을 위해 절영도에 선창을 만들었다고 하는 곳이다.

《가설  2》 여기서 자료1과 자료2를 참고로 사쓰마보리의 위치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우선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오기 위해서는 지금의 북항보다 남항으로 드나드는 것이 상례였을 것이다(지도1 참조). 그리고 시마쓰 요시히로는 임진ㆍ정유재란 때 그가 주로 활약한 지역이 南原城과 泗川城 등지이므로 서쪽방면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절영도의 서쪽(지도2의 N지점:남항동)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지도2의 D지점(대평동)은 육지와 가장 거리가 가까워 해류의 흐름이 빨라 선박을 계류하기에는 부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 ⓛ영도구 대평동 掘江일대는 사쓰마보리가 아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설 3》
 자료 2에 나타나는 시모노구치(下の口)라는 지명과 ‘이곳을 사쓰마보리(薩摩堀)라고 한다. 임진란 때 사쓰마의 병선을 대기 위하여 팠다고 하며, 조선인들은 이곳을 절영도의 서강(西江)이라고 부른다.’ 라는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영도의 봉래산을 기준막� 볼 때 서쪽은 위 지점 ⓛㆍ②보다 지점 ③이 정확하게 절영도의 서쪽에 해당하며, 자료 3에서 주갑(洲岬:모래톱  필자주)은 지도 2의 D지점에서 N지점까지의 부분 바깥 쪽(육지 쪽)으로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이후 사쓰마보리(薩摩堀)매축공사로 생긴 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부산항이 1876년 개항되면서 일본 선박의 왕래가 증가함에 따라 대풍포 매립공사(待風浦埋立工事)가 본격화 되었다. 그 뒤 일본인 志村作太郞이 대풍포를 매립하려고 일본 거류민단의 승낙을 얻어 매립권을 최초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志村이란 사람이 매립을 못하고 있는 사이 일본인 大澤이라는 사람이 일본인 거류민단에서 매립권을 양도받았다. 대풍포 매립공사는 1916년 착공하여 40,200여 평을 매립하여 1926년 6월 준공하였다.

《가설 4》
 자료 1에서 1607년 2월19일 정사 여우길 등이 몰운대로 유람을 갔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부산에 왜관이 없었으며(폐쇄), 따라서 이들은 동래부의 어느 곳에선가 머물렀을 것이다. 더구나 초량 쪽에는 당시 조그만 어촌에 불과하였으므로 최소한 자성대(부산진성) 부근에서 배를 타고 몰운대로 가기 위해 출발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가설 5》 예나 지금이나 육지와 섬의 가장 가까운 지금의 영도다리 부근에는 해류의 속도가 대단히 빠른 곳이다. 따라서 절영도 왜관을 ⓛ과 같이 대평동으로 가정하면 배가 통행하면서 왜관에 있던 타치바나 토시마사(橘智正)를 ‘배로 불러 만났다’는 것은 목적지가 절영도 왜관이 아니고 몰운대이기 때문에 논리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사 여우길이 탄 배로 타치바나 토시마사(橘智正)를 불러 만나기에는 조류관계로 선박의 접안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쓰마보리 처럼 해면에서 굴강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대평동쪽 보다 남항동 쪽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절영도 왜관의 관련자료】
자료1  참고문헌:오다 쇼고(小田省吾) 著 부산의 왜관변천과 흔적 임진정유재란으로 일단 단절되었던 조ㆍ일 국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열망과 소우 요시토시(宗義智)의 노력으로 회복되어 1606년에는 양국의 교섭이 이루어져 1607년 최초의 통신사 여우길(呂祐吉) 등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부사 경섬(慶暹, 號 七松)의 기행 해사록(海槎錄)은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에 의하면, 정사(正使) 일행은 동년 1월12일 한양을 출발하여 2월8일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공용(公用)의 행이(行李) 등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26일까지 부산에 머물렀는데, 그동안 19일에 정사(正使) 등은 배를 타고 몰운대로 유람을 떠나기로 했다. 이때 기록에 “가는 도중에 절영도 왜관 앞을 지나면서 타치바나 토시마사(橘智正)를 배로 불러 만나보았으며, 밤에 배를 타고 돌아갔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무렵 절영도 즉 목도(牧島)에 왜관(和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타치바나 토시마사(橘智正)는 소우씨(宗氏)의 가신으로 1601년 이후 포로를 송환하거나 혹은 개시(開市) 교섭 등 평화회복을 위해 바다를 건너기를 수차례이고 이번 강화교섭의 성공도 그의 공로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에서는 아마 1601년부터 임시왜관을 절영도에 설치하여 소우씨의 사절을 머물게 한 것이다. 
 이 임시왜관의 위치는 기록에서 절영도에서 부산시가지가 해안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 가옥이 심히 조잡하였다는 것은 토시마사(智正)가 이때 여우길 일행을 데리고 대마도에 건너가 7월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다시 그들과 동행하였는데 그때 상황을 해사록에는 “타치바나 토시마사(橘智正) 절영도에 머물게 하면 상륙하지 않겠다고 화를 내며 돌아가겠다고 하여 역관에게 쌀을 보내 이를 달랬다.” 라고 하였다. 이 왜관이 존재했던 기간은 1601년 무렵부터 1609년까지 8~9년 동안이었다. 위와 같이 절영도 왜관은 일반서적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를 믿지 않는 학자도 있고 또, 전혀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경섬(慶暹)의 해사록 기록에서 확실한 사료를 최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1611년 조선의 고문서로 해사록보다 불과 4년 뒤의 기록이다. 동 고문서에는 과거 왜관을 육지가 아닌 절영도에 두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편리하고 동시에 국가의 백년대계이다. 이를 육지에 두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1606년 조선통신사의 방문에 답례하기 위해 1609년 소우케(宗家)로부터 야나가와 토시나가(柳川智永), 승려 겐소(玄蘇)를 파견하여 하나의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유약조(己酉約條)인데 실로 도쿠가와 250년 동안의 수교를 보장한 것이다. 이로써 드디어 절영도 임시왜관을 다시 육지로 이전하게 되고 장소를 부산포에서 약간 남쪽으로 떨어진 두모포로 결정하여 1609년에 온 겐소 등이 그 장소를 확인하였다.

자료 2   참고문헌:타시로 가즈이(田代和生) 著 왜관 중에서 이곳에서 보면 부산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모노구치(下の口)라고 하는 곳은 절영도로 들어가는 서쪽의 후미진 곳을 가리킨다. ‘시모노구치(下の口)’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이곳을 사쓰마보리(薩摩堀)라고 한다. 임진란 때 사쓰마의 병선을 대기 위하여 팠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이곳을 절영도의 서강(西江)이라고 부른다.’ 고 되어 있다. 해마다 4월14일이 되면 이곳에 조선의 배가 몰려든다. 이날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부산진을 포위하고 첨사 정발 등을 쓰러뜨린 날이다. 전사자를 애도하는 동시에 기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방위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왜관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이고 있다고 한다.’ 고 되어 있다.

자료 3   참고문헌:日鮮通交史(부산갑인회) 附 釜山史
사쓰마보리(薩摩堀)매축
 이곳의 매축공사는 처음 부산거류민단에서 계획한 것을 훗날 지촌작태랑(志村作太郞)이 계승하여 독자적으로 경영하였는데, 그 설계는 주갑(洲岬) 전면 12,870평, 절영도 전면 3,950평, 사쓰마보리 안쪽 14,710평 등을 메워 절영도와 주갑(洲岬)중간을 관통시켜 항만의 해면으로부터 입구 폭 24칸, 중간 18칸의 수로를 통해 그 후방에 50칸 사방의 범선 계류장과 일부에 하역장을 만들어 선창의 주위 및 절영도 주갑(洲岬) 남쪽면의 매축지를 장래 각 공장 및 기타 어업설비에 충당하고, 그중 39,012평을 시가지로 하여 총공사비를400,000圓으로 설계하였고, 준공 후 총 땅값 예상은 648,000圓으로 대단히 유망한 사업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 공사가 중단된 것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며, 현재는 모든 공사를 포기하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주갑(洲岬) 뒤편 통선잔교(通船棧橋)부근의 매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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